잡초, 어디서든 자라는 풀 어쩌면 느슨한 예술 공동체 “쓸모없는 것 같으나 모여서 세상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다시 떠오르는 노랫가락 같은 것”-이제, 작가노트- 『월간 잡초』는 자발적 참여를 통해 제작되는 비정기 간행물이다. 이번 전시에는 까시, 김성희, 여미경, 옥인동 강, 이제, 정수진, 정원, 최정란이 참여한다. 잡초는 그들에게 어떤 질문이다. 그들의 발견과 상상은 머위와 고들빼기와 망초와 명아주 등의 모습을 따라 쉼 없이 여행한다. 우리에게 자신의 눈에 비친 ‘잡초’들을 내밀면서 이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묻는다면, 아직 내 생각은 너무나 미약해서 그것을 무엇이라 대답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휘트먼(W. Whitman)이 그랬던 것처럼 잡초가 무엇인지 말하는 것은 저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잡초’에 대한 특별한 문법에서만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미경은 자신이 “농사꾼도 아닌데 어떤 식물에 잡초라고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 자체가 생각해보면 이상”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월간 잡초』는 잡초라고 불리는 생명들에게 이름을 찾아주는 일이다. 이름으로서 잡초의 『표준국어대사전』 정의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이다. 이차적 정의는 “농작물 따위의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해가 되는 풀”이다. 즉 별 다른 쓰임이 없어 사람이 재배하지 않는 풀인데 어디서든 잘 자라 농작물 재배에 방해가 되는 것을 잡초라 부른다. 옥인동 강의 지적처럼 잡초는 ‘잡스러운 것’, 막 되서 상스럽고 순수하지 못하다. 이 의미는 우리 사회에서 쓸모없음과 그로 인해 그릇된 것으로 간주되는 위상을 암시한다. 이제는 잡초의 쓸모없음을 끌어안는다. “쓸모없는 것”이 모여서 세상을 이룬다. ‘쓸모없음’[無用]은 존재의 양상에 대한 동아시아의 오래된 은유다. 풀들은 땅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깊이 뿌리내린다. 까시의 눈에 비친 잡스러운 풀은 콘크리트 틈새에서조차도 무성히 자란다. 살아있음의 나아가는 힘은 콩크리트로 뒤덮힌 곳에서마저 존재의 본래 모습을 일깨운다. 그들 예술가에게 잡초란 부족함 없이 세상을 이루는 살아있음의 존재다. 쓸모없음의 은유는 삶의 원천인 생명력과 직접 맞닿아 있다. 생명이라는 존재의 일관성에 대한 이들의 시적 시선은 잡초의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를 드러낸다. 우리는 삶의 수많은 차원에서 총체적 심미를 살아간다. 이것은 저 세계와 폭 넓게 연결된 자연스러운 행복감이다. 우리는 이 행복감을 『월간 잡초』의 어디에나 만날 수 있다. 세상 제 각각의 모습은 정원의 작가노트에서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며, 서로 다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만의 느슨한 “교류”이며 『월간 잡초』를 통해 자발적으로 연결된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삶의 양상이다. 그들의 일은 일상에서 부딪치는 “잡초라고 불리는 생명들에게 이름을 찾아주는 일”이며, “목적 없이 걷는 산책길”에서 만나는 세계를 시적 시선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이 느긋한 공동체에서 작고 미약한 것들에 대한 저들의 발견은 일상의 평범한 삶과 수많은 나날과 흔한 세계를 이룬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은 스쳐지나가지만 “이내 다시 떠오르는 노랫가락”과 같은 것이다. ‘잡초’에 대한 그들의 특별한 문법은 여기에 있다. 잡초와 함께 쇠똥구리 소인이 찍힌 우편물이 도착했다. 나는 그들만큼 세상에 대해 설렐 줄 아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잡초에 대한 질문은 여전하다. 내가 대답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들처럼 오랫동안 산책을 나가야겠다. 정현주, 독립큐레이터,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