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 불편함의 지형도, 예술의 힘정현주, 독립 큐레이터 이번 전시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나는 두 권의 책, 『두 오월 이야기』와 『오월의 행진』을 소개하고, 책을 설계한 북 디자이너 김현희의 시선을 드러내고 싶다. 「오월의 행진」 프로젝트에는 모두 7명이 참여했다. 그림을 그린 창융치아(Chang Yoong Chia, 章永佳)와 연구자로서 글을 쓴 김서라, 마크 테(Mark Teh, 鄭家榮), 장민화(Teoh Ming Wah, 張敏華), 정소라, 정현주, 그리고 마지막에 참여하여 앞의 여섯 사람의 활동을 최종적으로 책으로 설계한 김현희다. 『두 오월 이야기』와 『오월의 행진』 『두 오월 이야기』와 『오월의 행진』은 2018년 5월에 있었던 창융치아의 전시 「오월의 행진」(2018.5.17.-6.30.)의 결과물이다. 창융치아는 전시를 위해 세 권의 아티스트북을 제작했다. 이를 통해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을 매개로 말레이시아 5.13 인종폭동의 전승된 트라우마를 소환했다.(1) 이번에 출간된 두 권의 책 가운데 『두 오월 이야기』는 그가 제작한 아티스트북 가운데 한 권이다. 논집 『오월의 행진』은 전시 「오월의 행진」을 위해 발행한 신문에 실렸던 글들을 전면적으로 보완하고 확장했다. 창융치아의 공동 기획자이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는 장민화는 말레이시아 필진들의 참여를 내게 제안하여 책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도록 도움을 주었다. 책에는 김서라와 마크 테, 장민화, 정소라, 정현주가 글을 썼다. 그들은 예술철학과 예술비평, 사회학, 정치철학, 인식론의 관점에서 창융치아의 『두 오월 이야기』를 매개로 삼아 은폐되고 폄하된 오월의 두 사건을 기억하고 성찰하기 위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김현희는 에세이 작업이 마무리되어 가던 무렵 책의 설계를 맡으면서 합류했다. 그는 “지리적으로 분리된” 광주와 말레이시아의 오월의 역사에 대해 자신이 인식할 수 있었던 지점들을 연결하면서 하나의 지형도를 만들어낸다. 오월의 사건들에 새겨진 폭력의 역사와 진실에 대한 그의 질문은 창융치아의 질문에 겹쳐진다. 그는 자신의 질문을 구조화하는 과정을 통해 사건의 피해자들을 추모하고 위로한다. 이제 그의 시선을 살펴보자. 불편함의 지형도 “나는 [5.13과 5.18이라는] 두 사건을 통해 폭력의 역사를 고찰하는 동시에, 진실을 드러내고 내면화된 두려움을 스스로 마주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예술가의 자세 또한 보여주고자 했다.” -김현희 작가노트- 우리가 책을 볼 때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짝을 이룬 두 책의 커버와 함께 세로로 좁고 긴 판형이 먼저 다가온다. 판형이 의미하는 것은 『두 오월 이야기』에 “군화와 행진을 상징하는 ‘신발’”의 형상이며, 이는 행진과 이후의 벌어진 유혈사태, 일상이 갑자기 폭력적 사태로 뒤바뀌는 전도적 상황에 처한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발자취를 가리킨다. 또한 좁고 긴 판형은 펼쳐서 읽는 책의 구조에 적합하지 않아서 읽기의 몰입을 방해한다. 화첩 형식인 『두 오월 이야기』 보다 일반 제본형식인 『오월의 행진』이 특히 그렇다. 이것은 책을 손에 쥘 때 잘 펼쳐지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끊임없이 느끼게 될 몸의 어떤 무의식적 불편함, 계속해서 책을 고쳐 잡게 만들 분명하게 인식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가리킨다. 김현희는 낯선 판형을 차용함으로써 책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게 될 두 오월의 진실과 몸의 불편함을 야기하는 책의 구조를 긴밀하게 엮어놓는다. 이 관계를 통해 몸의 생리적 불편함은 5.13과 5.18을 주시하는 독자의 심리적 공간을 끊임없이 침투하고 방해한다. 불편함의 지형도는 책과 독자의 관계적 방식에 관여하며, 잊히지 않는 기억을 잊으라고 재촉당하면서 느끼는 불안, 전승된 트라우마를 꺼내 보이는 창융치아의 고통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도록 의도된다. 이러한 설계를 통해 김현희가 표출시키는 것은 창융치아의 고통과 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깊은 위로와 연대다. 예술의 힘 2016년 겨울, 촛불집회 중에 창융치아에게 전시를 의뢰하면서 시작한 프로젝트는 2020년, 코로나19 감염사태로 6월 말로 미뤄진 김현희의 전시로 마무리된다. 그동안 한국과 말레이시아 두 나라의 정치적 상황은 계속해서 급변했다. 2018년 5월 정권 교체에 성공했던 말레이시아의 민주화 연합정권은 지난 2월 말, 인종차별정책인 부미푸트라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이 주도하는 쿠데타에 의해 실각했다.(2) 말레이시아의 작가들이 쿠데타 소식을 비통한 목소리로 알려왔을 때 나는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코로나19 감염사태로 인한 격리 시대에 말레이시아의 정치적 상황은 어떻게 흘러갈까? 그리고 일상적 삶에 대한 시인으로서 우리 예술가는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무엇을 환기시키고 바꾸기를 원하는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김현희를 포함한 7명은 서로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며, 서로에 의지하여 5.13과 5.18을 다양한 측면에서 인식할 수 있도록 구현했다. 느슨한 연대를 통해 이들 예술가의 모든 행위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오월의 기억과 사회적 트라우마를 “모든 사람이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열어버린다. 이들이 드러내는 것은 현재 인간관계에서 부재하는 것, 인간성이 부정되는 과정이다(3) 김현희는 폭력에 대한 기억과 고통에 공감하고, 결여의 표현으로서 불편함을 책의 형태에 구조화한다. 그의 시선을 통해서 이번 프로젝트는 희생자의 기억을 재의미화하기 위한 저항의 형태를 확장하고 이어간다. 예술의 의도된 설계는 정치적이다. 예술의 가능성은 결여를 식별하는 이 지점에 있으며 예술의 힘은 저항의 형태에서 비롯한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금언과,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선언하는 모든 지적 허무주의에 대립한다.(4) ———————-(1) 말레이시아 5.13 인종폭동: 1969년 5월 13일 중국계와 말레이계 민족 간에 유혈 충돌사태가 발생했다. 사태의 발단은, 5월10일 총선에서 주로 말레이시아계 중국인이 지지하는 정당이 예상 밖의 약진을 했고 축하 퍼레이드 과정에서 말레이계 지역에서 우발적인 충돌이 벌어졌다. 폭동은 급작스럽게 확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쿠알라룸푸르 시내와 수도권 인근 지역 일부에서는 약탈과 방화가 자행되었다. 이 때문에 전국적인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으며, 야간 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당시 경찰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사망 196명, 부상자 439명, 약탈과 차량방화가 각각 753건과 211건이었다. 이 가운데 중국계 사망자는 143명이며 약탈과 방화도 주로 중국계 거주 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권 정당은 정치적 요구와 그 와중에 터져 나온 인종 간 갈등을 강력하게 진압하고, 이를 인종폭동으로 규정하여 1970년에는 말레이인의 특별한 지위 조항을 대폭 확대한 ‘부미푸트라’(Bumiputra)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이것은 권리가 다른 두 종류의 국민, 말레이계 선주민인 부미푸트라와 이주민인 비 부미푸트라의 차별을 제도화하는 것과, 후자의 권리가 전자의 권리 앞에서 제한되는 정치사회적 체계 구축이 심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 쿠데타 직후, 말레이시아는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로 ‘이동 통제 명령’, 즉 봉쇄 아래에 있다. 봉쇄로 인해 말레이시아의 새 정부가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봉쇄가 새 정부의 구성원들에게 유리한 시간이 되고 비상사태 아래에서는 국회가 중단된 상황처럼 새 정부를 제도에 안착시키는 과정이 될 수 있다. (3) 「인터뷰」, 『오월의 행진』 (광주: 플럭서스/광주, 2020), p. 227.(4) 자크 랑시에르, 「잊을 수 없는 것들」, 『역사의 형상들』 (파주: 글항아리, 2016), pp. 56-68 참조. (ENG) Two Books, Topography of Discomfort, The Power of ArtChung Hyun JooIndependent curator, Doctor of Philosophy This exhibition has two purposes; to introduce the two books, Twins May Stories and People’s Marchings in May, and to reveal in particular the viewpoint of Kim Hyun Hee(金昡希), who designed the books. Seven people participated in the project “people’s marchings in May”: painter Chang Yoong Chia(章永佳), researchers Kim Seo Ra(金茜拉), Mark Teh(鄭家榮), Teoh Ming Wah(張敏華), Jeong So Ra(鄭蘇螺), Chung Hyun Joo(丁玄珠), and book designer Kim Hyun Hee. Twins May Stories and People’s Marchings in May Twins May Stories and People’s Marchings in May are the culmination of Chang Yoong Chia’s exhibition, “People’s Marchings in May” (2018.5.17.-6.30.). He produced three artist books for his presentation, and Twins May Stories is one of his artist books. For his books, he used the May 18 Democratization Movement as a subject matter for recollecting the trauma of the May 13 Racial Riots in Malaysia, which he inherited from his parents. The articles published in People’s Marchings in May are a full complement and extension of the articles in the newsletter for the exhibition. Teoh Ming Wah, who works as a freelance writer, suggested to me to include the participation of Malaysian writers, thus making the book as it is: written by Kim Seo Ra and Mark Teh, Teoh Ming Wah, Jeong So Ra, and Chung Hyun Joo. Focusing on the exhibition “People’s Marchings in May” in terms of art philosophy, art criticism, sociology, political philosophy, and epistemology, we wanted to provide a forum for public opinion to recollect and reflect on the two May incidents concealed and degraded for a long time. Kim Hyun Hee joined the project by taking part in the book’s design at the end of writing the essays. She created a topographical map by linking the points that she recognized about a complicated, but common history of the May incidents in Gwangju and Malaysia, which are “geographically separated.” Her questions about the history of violence and the truth of history engraved in two May incidents that we should be asking to know, overlap those of Chang Yoong Chia. Through the process of constructing her questions, she commemorates and comforts the victims of the incidents. Let’s take a look at her intention embodied in the books. Topography of Discomfort “I wanted to look into the history of violence through two incidents, 5.13 and 5.18, while also show the attitude of the artist who tries to reveal the truth and face his own internalized fear.” -Kim Hyun Hee’s artist notes- When we read the books, the narrow and long format comes to us first with the covers of the two books, which she pairs in black and red. What the book format forms, is the shape of ‘shoes,’ which symbolizes military boots and marches, used as the central motif in Twins May Stories. The form of shoes refers to the rallies and subsequent bloodshed, that is, the dizzying and chaotic footsteps through entirely reversed situations that daily life suddenly turns into a violent situation. Besides, the format is not suitable for the structure of the open book because of uneasiness to unfold well when a reader holds the book. The annoyance of the size hinders the immersion of reading, especially People’s Marchings in May. This feature causes discomfort that is difficult to recognize clearly, which will make the reader continue to fix the book because it does not open well when held in hand. By drawing on the unfamiliar format of the book, Kim Hyun Hee tightly weaves the book’s structure causing the body’s discomfort, with the truth of the two May incidents that we will confront throughout the book. Along with this relationship, the physiological discomfort of the body continually penetrates and hinders the psychological space of the reader, who gaze in miserableness at 5.13 and 5.18. The topographical map of discomfort is engaged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book and the reader. The intention is to make the readers experience at present the distress of Chang Yoong Chia, who brings forth his inherited trauma, the anxiety he feels as he is urged to forget his unforgettable memories. With this design, what Kim Hyun Hee expresses is the profound consolation and solidarity of Chang Yoong Chia’s suffering and the victims of the incidents. The power of Art The project began in the winter of 2016 when I asked Chang Yoong Chia about his solo exhibition in Gwangju during Candlelight rally, and ends in 2020 with Kim Hyun Hee’s presentation postponed to the end of June due to the COVID-19 infection. So far, the political situation in both Korea and Malaysia has changed rapidly. Malaysia’s Pakatan Harapan(Alliance of Hope) coalition government, which succeeded in changing its regime in May 2018, was collapsed in late February 2020 by a coup led by BERSATU and Parti Keadlian Rakyat established by former members of the racialist UMNO, after only 22 months in power. I didn’t know what to say to my Malaysian friends when they woefully announced to me the news of the coup. How does the political situation in Malaysia go in the age of quarantine caused by COVID-19 infection? And as poets of daily life, what do artists want to evoke and change, revealing their looks in intended design? In this project, the seven creators sympathized with each other’s awareness of the problems of 5.13 and 5.18. They did what they could do in their positions, and then discussed and visualized them from various aspects by relying on each other. Through this solidarity, every act of these artists opens up something unutterable or invisible, the memories for May incidents and the social traumas out “to the surface, so that everyone can see it.” What they reveal is currently absent from human relationships: the process of negation humanness.(1) Kim Hyun Hee identifies with the memory and suffering of violence, structures them in the books with discomfort as an expression of absence. Through her eyes, the project expands the form of resistance to the re-designation of the memories of victims. The work of art asserts its unique power of the form of resistance and remembering. The constancy of art will then go against Wittgenstein’s philosophical maxim that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 and the intellectual nihilism of the notion of the end of history or ideologies.(2) ——————–(1) “Interview”, People’s Marchings in May (Gwangju: FLUXUS/Gwangju, 2020), p. 242.(2) Jacques Rancière, “The unforgettable”, Figures of History, Trans. by J. Rose (Cambridge: Polity Press, 2014), p. 55. 거짓말정현주 이름 없는 무덤 아래 다수가 누워있지. / 그 결과가 같다고? 거짓말하지 마!-『두 오월 이야기』 독재의 권위주의 체제아래에서 학살과 같은 어떤 역사적 사실은 의도적인 은폐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거짓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정권이 결정한 해석은 사건을 덮어버리기 위한 논거이며, 피해자들이 증언을 할 수 없도록 정치적으로 압력을 가하게끔 이용되었다. 기억이 사실이 아니라는 부정 아래에서 사건은 살아남은 자들의 불온한 기억으로 망령처럼 떠돌게 될 뿐이었다. 창융치아의 『두 오월 이야기』는 5.13사건(the May 13 incident)의 불온한 기억에 대해 말하기를 시도한다. 이 글은 『두 오월 이야기』에서 그에게 상속된 트라우마가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을 살피고, 은폐된 것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을 검토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창융치아 작품의 배경인 말레이시아의 5.13사건과 그 핵심인 ‘말레이인의 특별한 지위’에 관한 헌법 조항, 제152조 및 제153조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5월 13일 1969년. 쿠알라룸푸르. 1969년 5월13일 중국계와 말레이계 민족 간에 유혈 충돌사태가 발생했다. 사태의 발단은, 5월10일 총선에서 주로 말레이시아계 중국인이 지지하는 정당이 예상 밖의 약진을 했고 축하 퍼레이드 과정에서 우발적인 충돌이 벌어졌다. 이는 말레이계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말해진다. 폭동은 급작스럽게 확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쿠알라룸푸르 시내와 수도권 인근 지역 일부에서는 약탈과 방화가 자행되었다. 이 때문에 전국적인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으며, 야간 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당시 경찰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사망 196명, 부상자 439명, 약탈과 차량방화가 각각 753건과 211건이었다. 이 가운데 중국계 사망자는 143명이며 약탈과 방화도 주로 중국계 거주 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방 외교부의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중국계 사망자만 6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사건 이후에 국가운영위원회(NOC, National Operations Council)가 1969년 10월 9일에 86쪽의 『5월 13일의 비극, 국가운영위원회의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 보고서에서는 폭동의 주요 원인으로 5.10 총선에서의 승리를 축하하는 중국계 야당의 도발, 중국계 비밀조직의 폭력행위, 중국계 중심의 공산주의자에 의한 책략 등을 거론하는데, 특히 중국계 정치인에 의한 선동적이고 무절제한 “민족적 정치”를 지목한다. 보고서가 집권정당의 관점에서 쓰였기 때문에 인종폭동의 원인이 전적으로 중국계에게 있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고, 경찰과 군대가 중국계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발포하고 살해, 약탈, 대량 체포를 부당하게 행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보고서』에서는 69년 선거의 쟁점과 그 내용이 민족폭동의 1차 원인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중국계 정치인들이 식민지 시대에 명문화된 「말레이인의 특별한 지위」 및 정치면・문화면에서의 말레이인의 우위를 확보하는 헌법 제152조와 제153조에 거세게 반대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969년에 이루어진 선거에서 야당은 말레이시아를 이루는 ‘전체 민족의 평등’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실제로 각자의 민족을 넘어서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정치적인 인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정치적 행위가 선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러한 인식은 복잡한 민족적 정체성과 그 이해에 가로막혀 불분명해진 것처럼 보인다. 말레이계가 중국계의 주장과 행동을 선주민으로서 말레이계가 가진 특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여겼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서의 행간에서 읽어낼 수 있다. 나아가 여러 복잡한 정치적 양상들이 말레이인들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이주한 민족의 위협에 대해 맞서서 행동해야할 절박감을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집권 정당은 정치적 요구와 그 와중에 터져 나온 인종 간 갈등을 강력하게 진압하고, 이를 인종폭동으로 규정하여 1년 뒤에는 말레이인의 특별한 지위 조항을 대폭 확대한 ‘부미푸트라 정책’(Bumiputra)을 시행하게 된다. 이것은 권리가 다른 두 종류의 국민, 말레이계 선주민인 부미푸트라와 이주민인 비 부미푸트라의 차별을 제도화하는 것이며, 후자의 권리가 전자의 권리 앞에서 제한되는 정치 사회적 체계 구축이 심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69년의 정치적 문제제기는 국민으로서의 여러 민족 간의 평등한 권리를 촉구한 것이었지만, 민족 간 유혈충돌로 나타나면서 선주민의 특권을 보다 체계적으로 보강한 부미푸트라 정책으로 귀착된다. 이는 야당의 정치적 시도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5.13 실태 파악과 원인을 해명하기 위한 조사ㆍ연구는 지금까지도 말레이시아 정부에 의해서 크게 제한되었다. 폭동의 경위와 원인을 후세에 전하는 공적 사료는 당시 국가운영위원회가 제시한 『보고서』에 한정된다. 공기관이 결정한 해석은 부미푸트라 정책 및 그것을 지원하는 체제의 정당화 논거로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한편, 그 해석 자체에 이의를 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5.13을 직접 겪은 증인들이 세상을 떠나는 가운데 폭동의 실태는 아무것도 규명되지 못하고 실태에 대한 기억은 그 발언마저 봉인된 상태다. 5.13은 말레이시아의 정치 사회적 체계의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분기점이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많은 의혹에 둘러싸여 있다. 쿠아키아숭(Kua Kia Soong)은 많은 국민들이 정부의 인종폭동에 대한 공식적 해석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실태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정부 여당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의 정당화의 논리를 통해 내세우는 “5.13사건의 망령”을 계속해서 두려워하게 되는 현 상황을 지적한다. 이 망령은 권위적 체제의 논리로, 창융치아와 같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에게 공포와 고통의 심리적 상태를 야기하면서 그들 내면에 깊숙이 스며있다. 2. 불온한 기억 『두 오월 이야기』(Twin May Stories)에서 두 마리의 작은 새가 오월의 두 사태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여기에서 창융치아는 5.18을 계기로 삼아 5.13의 물려받은 기억을 표면에 드러낸다. 5.13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벌어진 비극이다. 5.13에 대한 그의 기억은 “소문을 퍼트리지 말라”는 정부의 반복적인 경고와 함께, 부모 세대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통해 창융치아에게 전해졌고 그와 함께 트라우마도 상속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트라우마를 자기 안의 “터질 수 없는 폭탄” 또는 “불안한 비합리적 공포”(an uneasy irrational fear)라고 묘사한다. 이는 잊히지 않는 기억을 “나쁜 것”이기 때문에 잊으라고 재촉당하면서 그가 느끼는 공포다. 이 기억과 공포는 자신의 작업에서마저도 무의식적으로 “숨겨온” 것이다. 『두 오월 이야기』에서 ‘새’는 잊히지 않는 기억을 말하는 매개체다. 동시에 새의 모습은 신발의 바닥면에 새겨진 것으로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화첩에 횡렬로 대열을 이루며 반복적으로 찍힌 발자국이다. 이 다의적 형상은 오월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행진과 급작스런 유혈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남겨진 참혹하고 혼란스러운 발자취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여기에 신발 프린트를 따라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들이 이 사태에 희생된 많은 이들에 대한 서사를 시각적으로 엮는다. 새는 오월의 행진에 동참한 자인 동시에 이 사건의 증언자이며 그들의 기억을 물려받은 창융치아다. 새들은 오월의 두 사태에 대해 말한다. 같이 있는 다른 새가 사태들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새는 광주와 쿠알라룸푸르의 오월사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died)” “이름 없는 묘비에는 다수가 누워있다(lie)”고 말한다. 새의 말은 5.18과 5.13 사태에서 폭력과 무력 진압의 비참한 결과를 간접적으로 환기시킨다. 그곳에 함께 있는 새로부터 이 말은 바로 거짓말(lie)로 치부된다. 즉 다수가 누워있다(lie)는 증언은 사회적으로 거짓말(lie)이다. 말레이시아에서 5.13에 대한 개인의 모든 전언은 “소문을 퍼트리지 마라”와 “소문을 듣지 마라”라는 우편 소인이 찍힘으로써 공공연하게 날조된 거짓말이 되었고 정치적으로 침묵을 강요받았다. 모든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지금까지도 실재(real)가 될 수 없다.창융치아가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말에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강한 의심이다. 의심은 그의 경험과 전승된 기억을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물들인다. 그는 어디에서도 자신의 기억에 대해 말을 할 수 없다. 개인의 고통은 권위적 체제의 논리로 인한 사회질서에서 비롯되거나, 기본권이 박탈될 때 느끼는 무기력한 고립에 수반된다. 거짓은 어디에 있는가? 두 오월의 사건을 비교하던 앵무새의 말은 어느 순간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에 대한 작가의 내면을 구체적으로 노출시킨다. 광주의 오월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입이 있다”면 “우리는 벌레 깡통에서 밥(rice)이 아닌 머릿니(lice)와 여러 가지 모습의 무척추 동물을 먹도록 강요”당한다. 자신의 경험과 목소리가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의심받기 때문에 “여전히 거짓말을 해야”하는 상황은 먹어서는 안 되는, 혹은 더럽고 불경스런 어떤 것을 먹는 것과 같다. 거짓말은 명백히 사회를 이루는 관계에 반하는 ‘잘못된 말’이기 때문이다. 기만은 사회적 존재로서 그의 존재 자체를 침식한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우리는 척추가 없는 동물이 된다.” 그가 드러내는 것은 오랫동안 억눌린 내면의 불안과 고통과 분노다. 불온한 기억, 망령은 이와 같이 존재한다. 3. 5.13의 소환, 혹은 진실 “그 사건을 이야기해줄게.” 그곳에 같이 있는 새에게 작은 새가 다시 말한다. 비교는 단순하다. 두 행진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기억에 대한 침묵을 강요당했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하나는 드디어 그 진실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진실이 여전히 매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역사적 서사를 여전히 정부나 권력이 독점한다는 점에서 작은 새의 목소리는 거짓으로 간주된다. 달라진 것은 없다. 울림을 갖는 낱말은 ‘진실’이다. 진실을 언급함으로써 그는 다만 수많은 죽음에 대한 기억이 그와 같이 부정될 수 있는지를 도리어 묻는다. 비극으로 끝난 미완의 시도라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증언자의 기억이 끊임없이 거짓으로 단죄되었다는 점에서 5.13과 5.18의 실태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한국의 국가보안법의 경우처럼 독재체제에서 거짓은 체제를 방어하는 논리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 왔다. 의혹은 그 기억이 거짓으로 부정되는 사회의 논리에 있다. 거짓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 논리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필요한 것은 논리를 바꾸기 위한 행동이다. 진실과 거짓에 대한 창융치아의 문제제기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다. 그는 의혹을 간직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거짓은 사건의 전개와 피해를 설명하고 증명하는 일이 가능할 때에만 정권의 논리를 넘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여실하게 드러낸다. 그의 5.13의 소환은 체제의 정치적 논리를 바꾸기 위한 행동이다. 권위적 정권 아래에서 은폐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자기 내면에 스며든 망령을 이겨내는 일이다. 이 행동은 그만큼의 용기를 필요로 하며, 용기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자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마음에서 비롯한다. “우리의 피는 빨갛다. 하늘이 파랗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만큼 우리의 용기는 하얗다.” 『두 오월 이야기』는 사회적 기억에 대한 최소한의 변화를 시도한다. 그 시도가 단지 중국계와 말레이계 등의 민족 간의 의견차이만을 확인하게 될 뿐이라도, “지금은 거짓인 것이 미래에는 진실이 될 것”이라는 강한 희망을 견인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새가 되묻는다. “정말이야?”(oh, really?) 이 반응은 단호하게 거짓말이라고 부인하던 새에게서 나타나는 단순한 변화다. 체제의 논리는 여기에서 순간적으로 힘을 잃는다. 『두 오월 이야기』에서 작가의 희망은 여기에 머물러 있다. 사회적 변화는 물려받은 기억이 거짓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망령처럼 떠돌던 기억이 사실로 수용되기를 바라는 그의 희망이다. 체재의 논리 혹은 사회적 논리는 바뀔 수 있는 것일까? 미래는 분명하게 예측할 수 없으며 우리는 ‘희망’을 따라 다만 행동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작업이 일깨우고자 하는 것은 우리 안의 잠든, 진실을 알고자하는 희망이다. 그 희망을 따라, 예술은 발을 맞추는 우리의 행동을 촉발한다. 행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시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