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제8기후대(talks: the Eighth Climate)가오밍원, 김서라, 김성부, 김은주, 정화영, 정현주, 호어스트 바우어 09. 20.(화)-10.29.(금) 2016.선이고운치과갤러리 이번 전시 “대화: 제8기후대”는 제11회 광주 비엔날레에서 제시된 주제, “제8기후대: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던지는 하나의 메타적 물음이다. 지난 6월 초, 나는 호어스트 바우어가 제8기후대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 이메일을 받았다. 그 문제들을 공유하면서 나는 꼬르벵의 논문, 「근원적 이마주의 세계 또는 가상적이고 상상적인(Mundus Imaginalis, or the Imaginary and the Imaginal)」을 나의 철학과 대학원 동료들과 읽고 분석했다. 이번에 전시된 7개의 메타적 독해들은 지난 두 달 간의 결과물이며 자신의 논의를 전공 영역과 연결한 각각의 개별적 시선들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6명의 철학도와 1명의 예술가가 참여하는 논쟁적 대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활동이 어떻게 이해되든지 간에 이번 프로젝트의 목적은 제8기후대를 분석함으로써 11회 광주 비엔날레의 특정 문맥을 보다 더 용이하게 이해하는 것을 돕는 데 있다. 우리의 자발적 활동은 마리아 린드의 소통적 예술활동이 의미하는 바로 그 협력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독립큐레이터, 정현주 This exhibition, “talks: the Eighth Climate” is a meta-question about the subject, “The Eighth Climate: what does art do?” of 11th Gwangju Biennale. In early July, I received a polemical email from Horst Baur about several doubts on the Eighth Climate, the title of 11th Gwangju Biennale. Sharing these issues, I started to read and analyze H. Corbin’s paper, ‘Mundus Imaginalis, or the Imaginary and the Imaginal’ with my colleagues in the graduate school of philosophy department of JNU. Our seven readings of the paper are the outcomes from our conversation during the last two months. They respectively show their perspectives related to their fields of corresponding majors. This exhibition turns out to be our argumentative talks in which six philosophers and one artist join together. Although our project seems to raise issues about the Eighth Climate, the purpose of this project is to help viewers to understand the particular context of 11th Gwangju Biennale better by analyzing ‘the Eighth Climate’. Perhaps our spontaneous activity might be categorized as the collaborative inquiry that Maria Lind’s communicative art signifies. CHUNG Hyunjoo, Independent Curator, 8/2016 관련 근원적인 이마주의 세계(MUNDUS IMAGINALIS), 또는 가상적이고 상상적인 앙리 꼬르벵 (파리/테헤란)번역(Ruth Horine 영역본): 정현주 1972, 봄 - 취리히 [이 논문은 1964년 6월 파리에서 열린 상징주의(Symbolism)에 관한 학회에서 발표되었고 1964년 브뤼셀의 『the Cahiers internationaux de symbolisme』 6호(pp. 3-26)에 실렸다. 여기에서 인쇄본은 여덟 번째 기후대의 지형의 서술 (PP. 17-23)과 마찬가지인, 원본의 5쪽과 8쪽에 있는 기술적 성질(a technical nature) 단락을 생략하여 (저자의 허락 아래) 압축했다. 1971. 이 논문의 완전한 본문은 앙리 꼬르벵의 책, 『En Islam iranien: aspects spirituels et philosophiques』(Paris: Gallimard, 1971.)의 7권, 4부에 실려있다. 꼬르벵 교수의 다른 저술들은 정기적으로 『the Eranos Jahrbiicher』에 불어로 간행되고 있다. 영어로 번역된 그의 주요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Avicenna and the Visionary Recital』 (Bollingen Series LXVI) (N. Y. and London, 1960)와 『Creative Imagination in the Sufism of Ibn'Arabi』, (Princeton and London, 1969.) – Eds.] 이 논문의 제목으로 사용된 라틴어의 두 낱말, mundus imaginalis를 제안하는 나의 의도는, 인식(perception)의 엄밀한 방식에 상응하는 실재의 아주 엄밀한 질서를 규정하는 것이다. 근대 서양 언어가 우리로 하여금 비교할 수 있고 측정 할 수 있는 다양하고 다소간 모호한 동의어를 제안하는 것에 반해 라틴어 용어는 지시의 고정적이고 기술적인 관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우선 나는 고백하고 싶다. 두 낱말의 선택은 얼마 전 나에게 불가피하게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번역하거나 서술해야만 했던 작업에서 낱말 가상적인(imaginary)이 조금이라도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은 결코, 언어 사용이 이러한 낱말에 의지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자 의도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긍정적인 의미에서 이것을 재평가하기만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리 생각하지 않고 사용되는 용법에서 용어 ‘가상적인’은 비실재와, 즉 존재와 실존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어떤 것과, 한마디로 말하자면 유토피아(이상향)와 같은 어떤 것과 동일하게 다루어진다. 내가 최종적으로 또 다른 표현을 찾아야만 했던 이유는 나의 소명이자 천직이 수년동안 아랍과 페르시아 서적을 번역하기 위해 나에게 요구한 것이었다. 그 아랍과 페르시아 서적에는 내가 용어 가상적인에 단순히 만족했다는 것이, 심지어 모든 예비조치를 고려했다 하더라도, 그 용어가 그 의미를 속일 수도 있는 그런 의미들이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의 오래된 뿌리 깊은 사고방법로부터 사물의 다른 질서로 자신을 일깨우기 위해라도, 분발하는 서구 독자들의 잘못된 이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표현을 찾아야만 했다. 달리 말해서 프랑스어법에서 (그리고 영어법에서) 가상적인을 실재하지 않는 것, 유토피아와 동일시 한다면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내가 mundus imaginalis(근원적인 이마주의 세계)라고 부르고 이슬람의 신지학자(神智學, theosophy)들이 ‘제8기후대’로 이름을 붙인 실재의 질서와 현저히 다른 어떤 것의 징후를 보인다. 실재의 질서에 대한 짧은 개요를 서술한 후에, 우리는 이것, 즉 상상적 의식, 인지적 상상을 지각하는 기관(organ)을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거기에 실재로 있었던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몇몇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다. 1. “나코자 압아드Nâ-Kojâ-Abâd’” 또는 제8기후대 나는 막 낱말 ‘유토피아’를 언급했다. 아주 이상하게도 또는 어쩌면 ‘유토피아’는 아주 정곡을 찌르는 예이다. 페르시아 어에서 우리의 저자들은 Nâ-Kojâ-Abâd, “어디에도 없는 땅"으로 이 용어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이것의 장소성은 결코 하나의 유토피아가 아니다. 12세기 이슬람화된 이란에서 “고대 페르시아의 신지학을 부활시킨 사람”인 젊은 지도자 수흐라와르디(Shihāboddin Yaḥyā Sohrawardi)가 페르시아어로 쓴 몽상가의 이야기이면서 영적인 입문의 이야기이기도 한 아주 아름다운 서사를 보도록 하자. 각 서사의 시작에서 몽상가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왔는지를 초자연적 존재의 위대한 아름다움에게 묻고 그 존재의 현전에서 스스로를 발견한다. 본질적으로 저 이야기들은 집으로 귀환하기를 갈망하는 포로의 개인적인 역사로서 살아진 그노시스적(Gnostic’s) 경험을 예시한다. 수흐라와르디가 「진홍의 대천사장(Crimson Archangel)」으로 표제를 붙인 서사의 초반에 옥지기의 감시하는 눈을 피해 막 달아난, 즉 지각적 경험의 세계를 찰라적으로 떠난 포로는 그에게 나타난, 청년기의 모든 은혜를 부여받은 존재 앞에서 스스로가 사막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그(존재)에게 묻는다. “젊은이여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대답은 “왜 그러한가? 나는 창조자의 맏이[그노시스주의자의 용어로 Protokistos, 첫 번째로 창조된 것]다. 그리고 그대는 나를 젊은이라고 부르는가?”이다. 그의 기원은 그가 현현한 신비로운 자홍색이라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것은 그 광채가 지상에 있는 생명체 세계의 어둠에 의해 황혼의 보라색으로 약화되는 순수한 빛인 존재의 색깔이다. “나는 Qâf산 너머로부터 왔다….이것은 그대가 시작부터 있는 곳이고 일단 그대가 족쇄로부터 자유롭다면 되돌아갈 곳이다.” Qâf산은 산꼭대기 뒤에 산꼭대기와 계곡 뒤에 계곡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감싸면서 천상의 구, 모든 것을 건축하는 우주적 산맥이다. 그때 이것의 바깥으로 이끄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지만 그대는 멀리 여행할지 모른다”, 이것은, 마치 나침판의 바늘이 언제나 자기가 있는 지점으로 다시 방향을 트는 것처럼 “그대는 언제나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이것은 단순히 당신이 자신에게 되돌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Qâf산 너머 저기에서 누군가가 발견한 자아는 보다 높은 자아. “너”로서 경험된 자아이다. Khezr (또는 Khadir, 신비스러운 예언자, 영원한 방랑자 엘리야 또는 그의 생령(生靈))처럼 여행자는 삶의 샘에서 목욕해야만 한다. 참된 실재의 의미를 탐험하는 그는 이 샘에 도착했다. 그가 샘에서 몸을 일으켜 나타났을 때 그를 태양에 맞서 견디는 손바닥에 증류된, 손등을 지나가는 한 방울의 향유로 상상하는 재능을 부여받았다. 만약 그대가 Khezr라면 그대는 또한 어려움없이 Qâf산을 넘어서 지나갈 수 있다. 나코자 압아드Nâ-Kojâ-Abâd라는 표현은 낯설은 용어다. 이 용어는 페르시아 사전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고 내가 아는 한 수흐라와르디 자신이 순수하게 페르시아 어근을 사용해 만든 것이다. 문자적으로 이것은 어디에도 없는(Nâ-Kojâ) 땅(abâd)이라는 도시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언 듯 보기에도 정확히 용어 ou-topia의 동의어로 보일 수도 있는 이 용어를 여기에서 마주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고대 희랍어 사전의 어디에도 올라가 있지 않고 우리의 지각경험에 의해 탐험되고 제어될 수 있는 임의의 공간에서 어떤 장소의 부재, 원위치(situs)의 부재를 나타내는 추상적 개념으로 토마스 무어(T. More)의 창작이다. 어원적으로 그리고 문자적으로 이것은 Nâ-Kojâ-Abâd를 outopia(no place)로 또는 유토피아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개념의 잘못된 해석, 살아진 경험의 관점에서 이것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개념 뒤에 있는 의도의 잘못된 해석일수도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나에게 최소한 잘못된 번역일 수 있는 이유를 찾도록 시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여기에서, 시아파 이슬람의 유심론자에게 “숨겨진 이맘(Imam)의 땅”에 관계한 지식을 포함하여, 예지적 상태에서 즉 깨어 있는 것과 잠자는 것 사이의 중간 상태에서 탐색된 지형에 대한 지식더미의 실재 의미와 영향에 관해 우리의 마음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명확화는 영혼의 전체 영역과,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전체의 정신적 문화와 연결하는 차이를 우리에게 환기시키면서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현재 유토피아라고 칭하는 것이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유토피아적이라고 불리는 그러한 유형의 사람이 가능하게 되는가? 어떻게 그리고 왜 그는 그의 현상을 만드는가? 라고 질문하도록 이끈다. 사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것과 같은 어떤 것이 이슬람의 전통적 사유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10세기 파라비(Farabi)가 쓴 ‘완전한 도시’에 대한 저 서술이나 동일 선상에서 안달루시아의 철학자, 이븐 바자(Ibn Bajja, Avempace)가 12세기에 쓴 ‘은자의 지배’에 대한 저 서술이 오늘날 우리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유토피아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투사였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저 서술들이 유토피아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저 서술들 고유의 전제와 관점으로부터 나와, 대신 우리 고유의 차원을 강요하면서 저 서술들을 추상화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정신적인 도시를 가상적인 도시와 혼동하는 운명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낱말 Nâ-Kojâ-Abâd은 공간에서의 외연을 갖고 있지 하나의 장소와 같은 형태의 어떤 것을 표시하지 않는다. 사실 페르시아 낱말, abâd는 하나의 도시와 거주하는 교화된 지역과 결과적으로 펼쳐진 장소를 의미한다. 따라서 수흐라와르디가 “Qâf산 너머” 위치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Jâbalqâ와 Jâbarsa와 Hûrqalyâ 같은 모든 신비로운 도시가 그에게 재현하는 것이고 그를 통해 이슬람의 전체 신지학의 전통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 묘사가 아주 명확하게 만드는 것은 지형적으로 이러한 지역이 9번째 영역, 또는 영역의 영역, 또는 하나의 총체로서 우주를 감싸는 영역의 “볼록한 면”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묘사가 하나의 영역이, 방위 기점(方位基點)이 지시하는 우리의 세계에서 (또는 세계의 우리 측면에 관해) “영역”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종류의 방향을 규정하는, 지고의 영역을 떠나는 그 순간에 시작한다는 것이다. 일단 이러한 경계가 십자로 교차하게 되면 “어디”(ubi, kojâ)라는 질문은 최소한 지각적 경험의 범위에 있는 의미의 측면에서 의미가 없게 된다는 것은 명백해진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공간의 외부에 있는 장소인 Nâ-Kojâ-Abâd라는 표현을, 늘 사용되는 개념으로, 손짓으로 "어디"라고 묻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게 만들면서 다른 어떤 장소에, topos(장소)에 포함되지 않는 하나의 “장소”로 발견한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그 어디를 떠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심의 여지 없이 수반되는 것은, 장소의 경우에 동일하고 균질한 공간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으로서, 하나의 위치로부터 또 다른 위치로 가는 운동, 한 장소로부터 또 다른 장소로 가는 신체의 이동이 아니다. 수흐라와르디의 이야기의 말미에 태양을 지탱하는 손바닥에 고인 향유 방울의 상징이 제안하는 것처럼, 내면으로 향해 가는 것은, 그 내부를 관통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내면에 도달하면서, 누군가는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바깥에서, 또는 우리의 저자들의 언어로는 9번째 영역의 “볼록한 표면”에서 달리 말하자면 “Qâf산 너머에서” 발견한다. 본질적으로 관여된 관계는 내면적인, 비가시적인 비밀스러운(희랍어: ta eso, 아랍어: batin) 것과 외부의, 가시적인, 개방적인(희랍어: ta exo, 아랍어: zahir) 것과의 관계이거나 정신적 세계와 자연적인 세계와의 관계다. ‘~의 곳(ubi)’ 범주인 어딘가를 떠나는 것은 마치 아몬드가 껍질 속에 숨겨져 있는 것처럼, 감춰진 내면의 현실을 은폐하는 외부의 현상 또는 자연적 현상을 떠나는 것과 맞먹는다. 이방인, 그노시스파에게 이러한 단계는 고향으로의 귀환을 또는 최소한 이러한 방향으로 분투하는 것을 재현한다. 그러나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일단 여행이 완수되면 이제까지 내면의 숨겨진 것이었던 실재는 처음에는 외부적이고 가시적이었던 것을 감싸는 것으로 또는 둘러싸는 것으로 또는 담지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내재화의 결과로서 우리는 외재적 실재에서 비켜선다. 향후로 정신적 실재는 소위 물질적 실재를 감싸고 둘러싸며 담아낸다. 그러므로 정신적 실재는 “어디에서인가” 발견될 수 없다. “어디”는 이것(정신적 실재) 안에 있다. 달리 말해서 정신적 실재 그 자체는 모든 사물들의 ‘어디’이다. 이것은 어디에든 위치하는 것이 아니고 지각적 공간의 한 장소를 지시하는 ‘~의 곳(ubi)’ 범주인 “어디”를 질문해서 가려지는 것도 아니다. 뒤의 것과 비교해서 이것(정신적 실재)의 장소(abâd)는 Nâ-kojâ (어디에도 없는)이다. 왜냐하면 지각적 공간에 있는 것과 연결하여 이곳(ubi)은 하나의 ubique(어디든지)이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우리는 어쩌면 우리로 하여금 예지적 경험의 지형을 따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의미의 측면과 방향의 측면 모두에서 그 방법(불어로 sens:방향,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근대적 어휘에서 “마음의 허구” 또는 “가상적인 것들”로, 더 정확히 말해서 유토피아적 환상으로 그렇게 비하하는 의미로부터, 수흐라와르디와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은 유심론자들(spiritualists)의 예지적 경험을 구별하는 것을 발견하도록 도울 수 있다. 그렇지만 현 시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가 서구인들의 “불가지론적 반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극복하기 위한 실재적인 노력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유와 존재 사이의 단절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수 많은 이론들은 이러한 반성에서 암묵적인 기원을 갖는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확실한 경험과 증거와 대면하게 하는 다른 실재의 영역으로부터 우리가 빠져 나오게끔 도울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는 심지어 실재에 마음을 비밀스럽게 빼앗기는 때라도 이러한 실재로부터 벗어나기를 시도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일종의 모든 기발한 해명에 실재를 부여하지만 실재의 바로 이러한 존재에 의해 실재가 무엇인지를 시사할 수도 있는 유일한 것을 폐기한다! 단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사태에서도 우리의 물리적 세계에 관한 근대 과학의 가장 뛰어난 발견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주론을 가져야만 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가 물리적 세계에 배타적으로 관심을 갖는 한, 우리는 여전히 “Qâf산 너머의 이쪽에 관한” 실존의 양식에 얽매여있게 된다. 이슬람 신지학자들의 전통적 우주관은 다양한 우주로 이루어진 구조로 특징지워지고 “Qâf산 너머의” 즉 물리적 세계 너머의 중간 세계와 마찬가지로 중간에 있다. 이것은 존재의 행위가 저 세계에서 이것의 현존에 대한 하나의 표현인 실존의 양식으로만 이해할 수있다. 그와는 반대로, 존재의 이러한 행위 때문에 저 세계는 이것 안에서 떠오른다. 그때 미래 재생(再生)의 노정에서 우리의 자연적 공간 외부에 있는 보편의 장소가 되거나 될 것인 이러한 존재의 행위의 차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것들은 어떤 세계인가? 우리의 (인간 영혼에 의해 지배되는) 지상 세계와 (천체의 영혼에 의해 지배되는) 별의 운행을 기초로 한 우주 모두를 포괄하는 물리적이고 지각적인 세계가 있다. 지각적 세계는 현상적 세계다(molk). 거기에는 또한 위에서 말한 신비한 도시들이 자리해 있고 9번째 천체의 볼록한 표면에서 시작하는 Malakût라는 영혼 또는 천사 영혼의 초지각적 세계가 있다. 그리고 순수한 대천사장의 지성의 세계가 있다. 저 각각의 세 가지 세계에는 저 셋에 상응하는 감각, 상상, 지성이라는 인식의 기관이 있다. 저 셋은 이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에서의 자신의 부활로 확장되는 세겹의 인간 발전을 다스린다. 우리는 더 이상 사고와 외연의 진퇴양난에, 경험적 세계와 추상적 지성의 세계에 제한된 우주론과 인식론(gnoseology)의 도식에 갇혀있지 않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깨닫는다. 저것들 사이에는 매개하는 것이면서도 중간에 있는, 우리의 저자들이 “alam al-mithal(형상적 유추의 세계)”, 근원적인 이마주의 세계(mundus imaginalis)라고 묘사하는 하나의 세계, 존재론적으로 감각의 그리고 지성의 세계만큼 실재하는 하나의 세계가 있다. 이러한 세계는 이 세계 고유의 인식능력, 이름하여 상상적 힘, 인지적 기능과 함께하는 능력, 감각 인식과 지적 직관의 기능만큼 실재인 노에시스적(순수지성의, noetic) 가치를 요구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 가치를 근대인에 의해 소위 “환상”으로 동일시된, 그리고 그 사람의 말을 따르면 단지 “가상적인 것들(imaginings)”의 유출에 불과한 가상(imagination)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이러한 것은 우리를 물질의 중심부와 우리의 술어학 문제로 끌고 간다. 이러한 중간 우주, 우리가 앞서 “제8기후대”로 언급한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모든 사상가들에게 공간의 지각적 세계는 전통적 지리학에 속하는 7가지 기후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외연과 차원과 형상과 색을 가진 세계로 표상되는 또 다른 기후대가 있다. 하지만 저 속성들은 저 감각들이 마치 저것들이 물리적 신체의 특성인 것처럼, 동일한 양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차원과 형상과 색도 상상적 지각의 대상 또는 “심리-정신적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감각에 의해 인식됨이 없이, 지각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맞먹는 완전히 객관적이고 실재하는 이러한 세계는 제8기후대로 불려진다. 용어는 이것이 모든 기후대의 바깥에 있는 하나의 기후대, 모든 장소들의 바깥에 있는 한 장소, 어딘가의 바깥에 있는 곳(Nâ-Kojâ-Abâd)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표현이 또 다른 표현과 혼동되는 것을 신중하게 피한다면 terminus technicus(技術의 종말), 아랍어로 ‘alam al-mithal는 아마도 mundus archétўpus(원형의 세계)에 의해 번역될 수 있다. 때문에 동일한 낱말(‘alam al-mithal)은 (조로아스터교의 천사론의 관점에서 수흐라와르디에 의해 해석된) 플라톤 사상의 개념을 번역하기 위해 하나의 차이를 가지고 아랍어로 사용된다. 그 차이는 플라톤 사상을 나타 내기 위해 사용 될 때 이것이 거의 항상 매우 엄격하게 제한을 가하는 것인 mothol(mithâl의 복수형), aflâtûnîya nûrânîya, “플라톤의 빛의 원형”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 용어가 제8기후대의 세계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될 때마다 이것은 한편으로 개별적이고 단일한(singular) 사물의 원형 이마주를 지시한다. 이 경우에 이것은 감각지각이 가능한 세계와 비교하여 저 이마주들이 선존재하고 선예정된 것으로 존재하는 제8기후대의 동쪽 지역, Jâbalqa시를 지시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용어는 또한 제8기후대의 서쪽 지역, Jâbarsa시를 지시한다. 이것은 정신이 자연의 지상세계에 잠시 체류한 후에 거주하는 세계이거나 중간세계이고 우리의 사상과 욕망의 형태들이, 그리고 우리의 예감(presentiments)의 형태가, 그리고 우리의 행동의 형식이, 그리고 지구에서 완수된 모든 저작들의 형식이 시간을 초월하여 존속하는 세계이거나 중간세계다. ‘alam al-mithal(형상적 유추의 세계), mundus imaginalis(근원적인 이마주의 세계)는 저 모든 현시(顯示)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사상가들의 전문적인 언어를 다시 한 번 사용하려면, ‘alam al-mithal(형상적 유추의 세계)은 또한 “부유하는 상태의 이마주”(mothol mo’allaqa: 허공을 떠도는 비유)의 세계로 칭해진다. 수흐라와르디와 그의 학파는 이렇게 중간 세계의 실재와 상응하는 양식에 의지해 이해한다. 우리는 이것을 Imaginalia로 부를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이렇게 잘 규정된 지위는 가상적이고 정신적인 경험에 근거한다. 수흐라와르디는 이것을 천문학에서 히파르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관찰이 적절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완전히 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근원적인 이마주의 세계(mundus imaginalis)의 형태(forms)와 도형(figures)은 물리적 세계의 실증적 실재로 존속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저것들을 인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자들은 또한 저 형태와 도형들이 순수한 예지계(叡智界)에 존속할 수 없다는 것, 즉 저것들이 정말로 지각적 세계와 비교해 “비물질적” 물질성인 외연(extension)과 차원(dimension)을 갖지만 저것들 또한 그 고유의 유체성(corporality)과 공간성을 갖는다는 것에 주목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캠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 헨리 무어(H. More)가 처음으로 사용한 표현, spissitudo spiritualis(정신적 밀도)를 환기했으면 한다. 페르시아의 플라톤주의자, 사드라 쉬라즈의 저술에는 이것과 정확한 동의어가 있다.) 동일한 이유로, 그들은 이것을 하나의 마음에 있어 저 형태와 도형의 단일한 기층(sole substratum)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간주했다. 그리고 저것들이 반드시 비실재, 완전한 무(無)일 수밖에 없다는 가능성은 또한 폐기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저것들을 포착하거나 유별하거나 평가할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러한 중간세계의 존재, 근원적 이마주의 세계(mundus imaginalis)는 형이상학적 필연성이 된다. 상상(Imagination)은 이러한 세계로의 인지적 기능이다. 존재론적으로 이것은 감각계보다 더 높고, 순수한 예지계보다는 더 낮은 세계를 차지한다. 이것은 감각계보다는 더 비물질적이고 예지계보다는 덜 비물질적이다. 우리의 신비주의적 신지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상상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상징적 의례의 타당성만큼이나 “천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묘사하고 관련시키면서, 그들에게 꿈의 타당성과 예지적 보고를 예시하기 위한 토대를 제공했다. 이것은 집중명상 동안, 예언의 계시가 제공하는 상상적 정보에서 인식된, 직관에 따른 상상적 비전의 타당성과 우주 기원론과 신들의 계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신적 의미가 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타당성이 발생하는 장소들이 실재한다는 증거를 제공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미세한 신체(subtle bodies)”의 세계이고 순수한 정신과 물질적 신체 사이를 결합시키는 것이 있다고 이해하기 위한 몇몇 개념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저 양식들은 “부유하는 상태의 존재”로 묘사된다. 이마주나 형태의 양식처럼, 존재의 이러한 양식은 이것 고유의 “질료”를 구성하고 마치 우연인 것처럼 내재하는 실체(substratum)와는 독립적이다. 달리 말해서 이마주나 형태는 검은 색이, 이것이 내재하는 검은 본체를 통해 존속하는 방식으로 존속하지 않는다. 우리의 저자들이 정기적으로 사용하는 비교는 “부유하는 상태의” 거울에 나타나고 존속하는 방식이다. 거울의 물질적 내용은, 그것이 금속이든 돌이든 간에, 이마주의 실체는 아니다. 이마주는 오로지 우발적으로만 거울과 동일한 물질로 될 수 있다. 물질은 단순히 “이것의 현상의 장소”다. 따라서 우리는 수흐라와르디의 “동양적 신지학”의 특징인, 에피파니의(epiphanic, 통찰의 순간을 상징하는) 장소와 형태, mazhar (복수형 mazâhir)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으로 인도된다. 능동적 상상은 대표적인 거울(the mirror par excellence), 원형적 세계에 대한 이마주를 위한 에피파니적 장소다. 이것은 상상적 세계(mundus imaginalis) 이론이 상상적 세계의 중간에 있고 또 매개하는 위치 둘 다이기 때문에, 적법하게 핵심적이고 매개적인 기능인, 상상적 인지이론 그리고 상상적 기능이론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이유다. 상상적 기능은 이것(상상적 세계이론)을 모든 보편이 서로를 상징화할 수 있게끔 만든다. 그리고 실험적으로, 이것은 각각의 물질적인 실재가 각각의 보편과 상응하는 형태를 당연한 사실로 요구한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예를 들어, 미세한 세계에 있는 Jâbalqa와 Jâbarsâ는 물리적 세계의 원소(Elements)와 상응한다). 상상의 인지적 기능은 우리에게 이성주의의 현 난제를 모면하게 해주는 엄격한 유추적 앎의 토대를 제공한다. 저 난제는 "물질"이나 "마음” 둘 중 하나라는 케케묵은 두 이원론적 관점 사이에서 오로지 하나의 선택만을 제공할 뿐이다. 궁극적으로 양심의 “사회화”는 반드시 치명적인 것에 못지 않은 또 다른 것에 의해, 즉 역사” 또는 “신화”의 사회화에 의해 물질 또는 마음의 난제를 대체하게 마련이다. “미세한 신체”, 즉 “정신체”의 왕국인 “제8기후대”에 머무는 것에 익숙한 저것들 – Malakût의 역(閾:자극에 대해 반응하기 시작하는 분계점) 또는 정신의 세계는 이제까지 이러한 난제에 결코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것들은 Hûrqalya의 세계가 “가장 수승한 천구(Sphere)의 볼록한 표면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것은 명백하게도 이 세계가 “~에서”, “~의 내부에”라는 전치사에 의해 표현된 내면성의 관계가 반전된 한계점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상징적 방법이다. 정신체(Spiritual bodies) 또는 실체는 하나의 물질적 신체가 이것의 장소에 있거나 어쩌면 또 다른 신체에 담겨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어떤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것들의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저것들의 세계는 그 정신체에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비세나Avicenna가 주석을 하고 우리의 모든 사상가들이 차례로 읽고 묵상하는 플로티노스Plotinus의 세 개의 엔네아데스Enneads의 마지막 편의 아랍어 버전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기인한 신학은 각각의 정신적 실체가 “천국의 전 영역에” 있다고 설명한다. 물론 저 모든 실체들은 서로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각각은 서로에 담겨 있다. 이것은 이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형태없는 세계로 상상한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일 것이다. 확실히 다양성은 있지만 정신적 영역에서 상대적인 위치는 신체에 실존하는 환경이 “누군가의 천국(Heaven)의 완전성에” 있는 사실과는 다른 것처럼 별이 빛나는 하늘에 둘러싸인 그 공간에 있는 저것들(위치)만큼의 차이가 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것은 “이 세상의 뒤편에 천국과 지구와 바다와 동물과 식물과 천인이 있다. 하지만 이 안에서 모든 존재는 천상계에 있다. 거기에 존속하는 정신적 실체는 인간과 동등하지만 이것은 인간들이 지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해질 수 있다. 서구의 신지학 전통에서 이러한 모든 것의 가장 명확한 기술(記述)은 아마도 스베덴보리(Swedenborg)에게서 발견된다. 그 누군가는 위대한 스웨덴의 신지학자이고 관념론자의 진술들이 수흐라와르디 또는 이븐 아라비(Ibn ‘Arabi) 또는 사드라 쉬라지의 진술과 일치되는 정도를 보고 받는 충격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천국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세계에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소와 공간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천사들은 여전히 장소와 공간의 어떤 개념이나 관념도 갖지 않는다. [사실,] 정신적 세계에서의 진전은 내적인 상태의 변화에 의해 영향 받는다.……그러한 이유로, 이들은 유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는 서로 가까이에 있고, 상태가 이질적인 사람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천국에서의 공간은 내적 상태에 상응하는 외재적 상태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것은 천국들이 서로 구별되는 유일한 사례다.…… 누군가 한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 나아갈……때……그 사람이 욕망한다면 더 빨리 그리고 욕망하지 않는다면 더 나중에 도착한다. 길 그 자체는 욕망의 강도에 따라 길어지거나 짧아진다.……이것은 내가 종종 목격하고 궁금해왔던 것이다. 저 사실들로부터, 거리 그리고 결과적으로 공간이 저 내적인 상태에 따라 완전히 천사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다시금 분명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때문에 공간의 개념과 관념이 저 사유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은 세계에서처럼 동등하게 저 천사들과 함께 존재한다. 이러한 기술은 탁월하게 Nâ-Kojâ-Abâd와 신비스러운 도시들에 잘 적용된다. 짧게 말하자면 정신적인 장소와 신체적 장소가 있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전환은 우리의 균일한 물리적 공간의 법칙을 따라 성취된 방법에 있다. 신체적 공간과 비교하여, 정신적인 공간은 하나의 어디도 아닌 곳이고 Nâ-Kojâ-Abâd에 다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것은 모든 일상적인 의식의 흔적에 반하여 벌어진다. 때문에 이제부터는 어디, 즉 장소가 영혼에 있다. 신체적 실체는 정신적 실체에 거주한다. 영혼은 몸을 에워싸고 데리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 누군가는 정신적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할 수 없다. 차라리 있다기보다는 이것은 놓아 두는 것, 놓아 두고 있는 것이다. 이 곳(ubi)은 가는 곳마다(ubique)이다. 물론 지형적 상응은 지각적 세계와, 다른 것과 함께 상징하는 하나인, 근원적 이마주의 세계(mundus imaginalis) 사이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끊임없이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보고서들이 이것을 지적한다. 하나는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에 거기에는 우리의 지도에 기초하여 설립한 지리적 좌표가 와해된다. 오로지 “여행자”만이 그 순간에 이것을 모른다. 그는 이것을 오로지 그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나 경악하든지 놀라던지 간에 깨닫는다. 만약 그가 이것을 주목했다면, 그는 자유로이 자신의 발자취를 되짚어 갈 수 있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 길을 가르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그가 어디에 있는지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누구에게도 그 길을 보여줄 수 없다. 2. 정신적 상상 여기에서 우리는 선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준비를 시켰던 결정적인 지점에 관해 언급한다. 즉 근원적 이마주 세계(mundus imaginalis)로의 침투, “제8기후대”로의 여행이 완수되는 것으로서의 기관에 관해 언급한다. 외부에서 내부로(ab extra ad intra) 회귀, 지형상의 도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운동을 산출 가능한 이 기관은 무엇인가? 이것은 물리적 유기체의 감각이나 능력이 아니다. 하물며 순수한 지성은 더욱 아니다. 차라리 이것은 아주 탁월하게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매개적 힘, 즉 능동적 상상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왜곡도 없다. 관여된 것은 내면의 정신적 상태의 변성(transmutation)을 외적인 상태로, 저 내적 상태로 상징화하면서, 시야-사태로 가능하게 만드는 기관이다. 정신적 공간에서의 어떤 진전도 이 변성에 의해서 완수되거나 변성 그 자체가 훨씬 더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근접한”, 그리고 “거리가 있는” 그리고 “멀리 떨어진” 장소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거기에 공간이 생기게 한다. 첫 번째 상정(postulate)은 이러한 상상이 반드시 물리적 유기체과 독립적인 순수하게 정신적인 능력이어야만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물리적 유기체가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중에서 사드라 쉬라즈는 몇 차례나 이 점을 주장했다. 마치 영혼이 지성으로 알 수 있는 것(intelligibles)을 수용하는 행위를 위한 지적 능력에서는 물질, 물리적 신체로부터 독립적인 것처럼, 영혼 또한 상상적 능력과 이 능력의 상상적 활동에서는 물질로부터 독립적이다. 더욱이 이것이 이 세계로부터 분리될 때, 영혼은 능동적 상상력을 활용하는 그 자체다. 그러므로 영혼 고유의 본질과 상상의 이러한 능력에 의해서 영혼은 구체적인 사물들을 지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지각은 앎(인지)과 상상에서 실현되는 것으로서의 실존이고 이것은 저 사물들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실존적 형태인 eo ipso를 구성한다. 달리 말해서 의식과 이것의 대상은 여기에서 존재론적으로 분리불가능하다. 이러한 분리 이후에 모든 영혼의 힘은 능동적 상상의 유일한 능력으로 결집하고 집중하게 된다. 그때 상상적 지각은 물리적 신체의 다섯 감각의 다양한 한계점에 분산되는 것을 멈추기 때문에 그리고 외재하는 세계의 변천을 드러내는 물리적 신체에 대한 주의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상상적 지각은 결과적으로 7가지 지각을 뛰어 넘는 참된 우월성을 내보일 수 있다. (사드라 쉬라즈가 쓴다.) 그때 영혼의 모든 능력은 마치 하나의 단일한 능력인 것처럼 모양을 만들고 유형화하는(taswir과 tamthil) 능력이 된다. 영혼의 상상력은 단지 초감각적인 것(super-sensible)에 대한 감각적 지각처럼 된다. 영혼의 상상적 통찰은 이것의 감지될 수 있는(sensible) 통찰과 같다. 따라서 이것의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으로 느끼는 것[모든 상상적 감각들]은 단지 감지되는 능력과 상응하는 것과 같지만 저 상상적 감각은 초감각적인 것에 기인한다. 외부 세계에서 다섯 가지 지각되는 능력이 각각 신체에서의 구체적인 기관과 같이 있는 반면에 내적 세계에서 저것들은 하나로 통합된다(hiss rnoshtarak). 상상을 영혼의 currus subtilis (희랍어: okhêma, 섬세한 수레 또는 신체)와 동일시하면서, 저 텍스트에서 사드라 쉬라즈는 “미세한 신체”의 온전한 생리학을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부활의 신체(body of resurrection)”를 피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심지어 아비세나가 별세계의(otherworldly) 상상적 인식 행위를 지금 여기에서 삶이 이루어지는 동안 꿈에서 벌어지는 것과 동일시한 점을 비난했다. 그래서 사드라 쉬라즈는 심지어 꿈꾸는 동안에도 상상적 힘은 물리적 신체에서 벌어지는 기관적 활동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까닭에 이 힘은 최대한의 완전함과 활동으로부터 즉 자유와 순수함으로부터 오는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잠은 단순히 별세계에서의 깨어남일 것이다. 그러나 저것은, 때로 선지자의 것으로, 때로 시아파의 첫 번째 이맘(예배를 인도하는 성직자)의 것으로 생각되는 “인간은 잠들어 있다. 오로지 죽을 때에만 그들은 깨어난다”와 같은 서술이 암시하는 것만큼은 아니다. 두 번째 상정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귀착한다. 정신적 상상력은 참된 앎의 기관인 인지적 힘이다. 상상적 지각과 상상적 의식은 그것들 고유의 세계에서 기능을 가지고 노에시스적(인지적) 가치를 갖는다. 이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간이 역전되는 그리고 하나의 내적 상태의 외부적 양상일 뿐인 공간이 자유로이 창조되는, ‘alam al-mithal(형상적 유추의 세계), 근원적 이마주의 세계(mundus imaginalis), Hûrqalya와 같이 신비로운 도시들의 세계다. 따라서 상상은 확고하게 두 개의 다른 인지적 기능의 축 주위에 자리 잡는다. 상상 고유의 세계는 세계와 함께 두 개의 다른 기능이 (감각할 수 있는 인지와 지성적 인지)에 상응하는 것을 상징한다. 달리 말해서 상상을 제 위치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무모한 소모로부터 지켜내는 일종의 제어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올바른 기능을 당연한 사실로 요구할 수 있고 수흐라와르디와 다른 사람들의 예지적 서사와 연관된 사상(事象)을 초래할 수 있다. 때문에 제8기후대로의 접근은 반드시 상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어쩌면, 동일한 원형이 새로운 상징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연하고 재부연하는 (‘Attar로부터 Jami 와 Nur ‘Ali-Shah 쪽에 걸쳐) 페르시아의 신비적 서사시에서 조우하는 언어의 예외적인 진지함에 대한 이유일 수 있다. 상상이 제 위치를 벗어나고 함부로 낭비될 때 마다, 상상이 내적 지혜로 인도하는 상징을 지각하고 산출하는 그 기능을 완수하는 것을 그칠 때, (Malakut, 영혼 세계의 영역인) 근원적 이마주의 세계(mundus imaginalis)는 사라졌다고 간주될 수 있다. 서구에서 이러한 타락(decadence)은 아베로에스학파(Averroism)가 혼(Animae) 또는 신들의 천사(Angeli caelestes)라는 중간 천사계급으로 아비세나의 우주론을 거부하는 그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지성의 천사 단계보다는 더 낮은 계층구조의 전 단계에서) 저 신들의 천사(Angeli caelestes)는 사실 가장 순수한 형태에서의 상상적 힘의 특권을 가졌다. 한번 저 영혼의 우주가 사라져 버렸을 때, 상상적 기능 그 자체는 이어진 자리에서 퇴출되었고 가치가 폄훼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나중에 파라켈수스에 의해 제기된 경고를 연금술사가 이것을 환상과 함께 그 “미친 사람의 주춧돌"로 불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용어학의 문제를 피할 수 없는 바로 그 이유다. 어떤 이유에서 불어로 (그리고 영어로) 우리가 현재 그리고 완전히 ‘alam al-mithal(형상적 유추의 세계)의 관념에 대한 표현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우리가 한편으로 상상적이거나 상상하는 지각의 대상과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공통적으로 ‘상상’으로 간주하는 것 사이에 있는 어떤 혼란을 반드시 피해야만 하기 때문에 나는 이제까지 라틴어 mundus imaginali(근원적 이마주의 세계)를 제안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성향이 마치 상상이 실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적인 것처럼, 상징을 알레고리로 혼동하거나 정신적 의미에 대한 주해를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혼동하는 것이 관습적인 행위로 나타난 것만큼 실재와 상상을 나란히 놓는다. 알레고리(allegory), 무해함(being harmless)은 하나의 덮개다. 또는 차라리 이미 알려진, 또는 최소한 다른 어떤 방법으로라도 알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희화화다. 반면에 하나의 상징으로 자격이 부여된 하나의 이마주의 출현은 하나의 원초적 현상(Urphaenomen)이다. 이것의 출현은 무조건적이고 환원될 수 없는 그 모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세계에서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그 자체를 명시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수흐라와르디의 이야기도, 시아파의 전통에서 “숨겨진 이맘의 땅”에 도달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도 모두 상상의 영역, 실재하지 않는 것 또는 알레고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제8기후대, 또는 “어디에도 없는 땅”이란 우리가 공통적으로 유토피아로 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과학의 실증적 제어를 넘어선 세계로서 이것은 하나의 초감각적인 세계다. 이것은 상상적 지각에 의해서 오로지 지각될 수 있을 뿐이고 거기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은 상상적이거나 상상하는 의식에 의해서만 살아질 수 있다. 포함되는 것이 우리가 현재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처럼의 상상이 아니라, Imaginatio vera인 예지(vision)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자. 그리고 이 Imaginatio vera는 반드시 노에시스적 또는 인지적 가치를 완전히 보유하는 것으로서 간주되어야만 한다. 만약 더 이상 la folle du logis(상상력, 공상) 이외의 측면에서 상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제까지 그 기준과 규칙들, 즉 내가 가끔 imaginatrice(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로 언급하는, 상상의 인지적 기능을 보장하는 학습과 “축의 배열”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반드시 강조되어야할 것은 저 동양의 신지학자가 규명했던 세계가 완전하게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실재는 실재가 감각에 의해 지각 된다고 하는 실증적 세계의 실재보다 더 반박하기 어렵고 정합적이다. 돌아오자마자, 이 세계를 보는 사람은 완전하게 “어떤 다른 곳”에 있었던 것에 대해 깨닫는다. 저것들은 단지 정신분열증적인 것만이 아니다. 이 세계는 바로 그 감각지각의 행위 뒤에 숨겨져 있고 이것의 명백한 객관적 확실성 아래에서 탐색되어야 만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세계의 현재적 의미에서 확정적으로 이것에 가상적인 것 즉, 비실재 또는 비존재로서의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 라틴어 낱말 origo가 프랑스어에서 우리에게 originaire(~에서 태어난), original(본래의), originel(초기의)와 같은 파생어들을 제공하는 것처럼, 낱말 imago는 우리에게 규칙적 파생어 imaginary(가상적인)에 덧붙여 용어 imaginal(상상적)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상상적 세계를 감각될 수 있는 세계와 이해될 수 있는 세계 사이의 중간적인 세계로 가진다. 우리가 제8기후대에 도달하는 “미세한 신체” 또는 “부활의 신체”를 표시하는 아랍 용어 jism mithali를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이것을 문자적으로, 당연히 가상적 신체가 아니라, 상상적 신체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신화적인 것”도 “역사적인 것”도 아닌 형상을 위치시키는 것이 덜 어려울 것이고 어쩌면 이러한 번역이 우리에게 “잃어버린 대륙”으로 인도하는 길을 위한 암호를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길을 여행할 용기를 찾기 위해, 스스로에게 우리의 실재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실재가 무엇인지 물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떠날 때, 하나의 가상적인 세계 이상을, 또는 하나의 유토피아 이상을 획득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무엇이 저 전통적인 동양의 사상가들을 제8기후대, Nâ-Kojâ-Abâd에 도달하게 만드는 실재인지를 질문해야만 할 것이다. 어떻게 그 사상가들은 실재를 떠나지 않고 지각 가능한 세계를 떠날 수 있는가? 또는 차라리, 어째서 오로지 그렇게 해서만 참된 실재를 획득하는 것인가? 이것은 우리 고유의 단계보다 더 많은 단계와 함께 존재의 규모를 전제한다. 어떤 오류도 만들지 말고 단순히 서구에서 우리의 선임자들이 상상을 지나치게 이성주의적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지성주의적으로 생각했다고 표명하자. 우리가 오름차순으로 정렬된 다수의 우주와 함께 동양의 전통 철학자들의 우주론과 유사하게 구성된 우주론에 접근하지 않는 한, 우리의 상상은 여전히 주제를 벗어날 것이고 힘으로의 우리의 의지와 함께 이것의 되풀이되는 결합(conjunctions)이 결코 끝나지 않는 공포의 원천이 될 것이다. 저 사태에서 우리는 상상의 새로운 규율(discipline)를 찾기 위해 스스로를 구금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것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방법과 실재를 따라 행동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는 동안은 이러한 새로운 규율을 찾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이제 우리가 느끼는 이러한 실재는 우리가 이것을 우리의 전통적 신지학자들에 의해 묘사된 실재와 비교하자마자 임의로 제한된다. 그리고 이 제한은 실재 그 자체의 지위를 낮춘다. 언제나 실재를 구속하기위한 변명으로 제공되는 또 다른 표현은 reverie(몽상), 예를 들어 문학과 같은 몽상 또는 현재까지 더 많은 사회적 환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mundus imaginalis(근원적 이마주의 세계)가 상실될 필요가 없다면, 상상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면, 환상적인 것과 끔찍한 것, 괴이한 것, 섬뜩한 것, 비참한 것, 어리석은 것이 표면화될 수 있도록 가상적인 것의 형태 안에서 미분리된 것을 세속화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어떤지를 물어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와는 반대로 근원적 이마주의 세계가 상실된다면, 전통적인 형식에서 이슬람 문화의 예술과 상상은 신성에 의해, 진지함에 의해, 중력에 의해, 양식화에 의해, 의미에 의해 특징 지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유토피아도, 공상과학소설도, 심지어 해로운 “오메가 점”도 어디에도 없는 땅, Nâ-Kojâ-Abâd에 도달해 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제8기후대를 아는 사람들은 시아파의 사고의 궁극점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환상이 아닌 것처럼 유토피아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의 종말론(eschatology)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의 기대이고 지금 여기에서 그와 같이 함축하는 것처럼 또 다른 세계에서의 하나의 실재적 현존이고 이러한 다른 세계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 의심의 여지없이 수많은 논평들은 이 주제에 관해, 심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이고 비전통적인 형이상학자들 모두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잠정적 결론을 경유하여, 나는 스스로를 세 개의 작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한정하고 싶다. 1) 우리는 더 이상 전통문화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심지어 이마주들을 이제까지 자유로이 구사해 왔다고 말해지는 과학문명에 살고 있다. 우리의 현재의 문명(정확히 말해서 잡지, 영화, 텔레비전)이 “이마주의 문명”으로 언급되는 것은 아주 진부한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러한 것이 또한 모든 진부한 것들처럼 철저한 오해, 완전한 왜곡을 품는지 아닌지를 궁금해 한다. 때문에 이것이 속한 세계의 단계로 상승된 이마주 대신, 내적 의미로 인도할지도 모르는 상징적 기능을 부여받는 것 대신, 이마주는 지각 가능한 인식의 단계로 단순히 환원되는 경향이 있고 이와 같이 분명히 저하되는 경향이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미분리된 것의 감각을 상실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허구에 불과한 산출을 선고받을수록 이러한 환원의 성공도 더 높아진다고 누군가는 그와 같이 말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2) 그 기원이 비이성적이며, 우리의 세계로의 난입이 예견할 수 없지만, 그 자명한 가정이 거부될 수 없는 원형적 이마주들의 시원에 있는, 그리고 객관적인, 절대적으로 기본적이고 환원불가능한 사실(Urphanomen) 없이 모든 형상화(imagery)는, 저 동양 서사의 무대 배경은 가능할 것인가? 3)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저것들이 객관적 실재를 획득하도록 정신적 이마주에 마법적으로 작용하는 (밀의적이거나 카발라적이거나 만다라적인) 어떤 형상과 어떤 상징적 문장들에 의해, 우리에게 암시되거나 덧씌워지는 상상적 세계의 객관성이라는 자명한 가정은 아닌가? 초자연적 형상의 객관적 실재에 관한 그리고 저것들과의 마주침에 관한 질문에 가능한 답변을 암시하기 위해, 나는 비예르 드 릴-아담(Villiers de l’Isle-Adam)이 흙의 눈으로 꿰뚫을 수 없는 전령의 얼굴에 대해 말하는 특별한 텍스트를 언급하고 싶다. 그의 얼굴은 “마음에 의해서 지각될 수 있을 뿐이다. 살아있는 창조물들은 오로지 대천사장의 실체에 내재하는 영향을 경험할 뿐이다.” 그는 계속해서 쓴다. “천사들은 실질적으로 실재가 이상적인 하나의 천국인 완벽한 천국의 자유로운 숭고함에서만 실존한다…천사들은 스스로를 오직 그들이 불러 일으키는 그리고 그들 안에 내재하는 무아경에서만 외현화한다.” 저 마지막 낱말들—그들 안에 내재하는 무아경은 나에게 예언적 명료함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저것들은 의식과 이것의 대상, 사고와 존재의 상호 고립를 돌파한다는 의미에서 심지어 의심의 바위마저 산산조각내는, “불가지론자의 반사적 반응”을 마비시키는 미덕을 갖는다. 여기에서 현상학은 존재론이 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은 우리 저자들의 상상적인 것(imaginal)에 관한 가정이다. 현현 그 자체 이외에 천사의 현현을 위한 외재적 기준이란 없다. 천사란 바로 우리의 존재상태에서의 변화를 묘사하는 “무아경”, 우리 자신을 벗어난 이동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 낱말들은 또한 “숨겨진 이맘”의 초자연적 존재의 비밀이 시아파적(Shi'ite) 의식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맘은 이 의식의 무아경(ekstasis)이다. 동일한 정신적 상태가 아닌 사람은 누구도 그 사람을 볼 수 없다. 이것은 수흐라와르디가 그의 서사 「진홍의 대천사장」에서 암시했던 것이다. 즉, 우리가 초반에 인용한 문장에 의지해 그가 의미했던 것이다. “만약 그대가 Khezr라면 그대 또한 어려움 없이 Qâf산을 너머 지나갈 수 있다.” 출처: www.bahaistudies.net/asma/mundus_imaginalis.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