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힘, 그 시적 시선에 관하여 자연의 경이. 우리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경이를 보여준다고. 예술은 자연의 경이라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고. (개화하는 꽃. 그것의 무엇이 멋진가?라는 질문에) 우리들은 말 한다: “보라, 저것이 어떻게 피는가를!”L. 비트겐슈타인, MS 134 27: pp. 124-25.“쓰다듬듯이”를 본다. 마치 공책의 낱장 위에 연필로 대충 그린듯한 연필소묘는 서로 마주앉은 남자와 개를 관찰하는 박정근의 시선이다. 그의 시선은 솔직하다. “쓰다듬듯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림은 그저 투박한 인상의 남자가 다소곳이 앉아 있는 개를 쓰다듬는 행위를 보여줄 뿐이다. 그림 속의 형상들은 우리를 경이롭게 만드는 세련된 감각이나 섬세한 기교나 예술로 행해지는 모든 난해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 기교 없음은 거칠고 소박하다. 이렇듯 “조야(粗野)함”은 박정근의 시선을 한마디로 특징지을 수 있는 방식처럼 보인다. “쓰다듬듯이”라는 제목은 또한 쓰다듬는 행위를 통해 그렇게 더불어 다정하게 살고 싶어 하는 어떤 마음 또한 단순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그가 삶을 통해 구현하려는 어떤 아름다움, 즉 가치이기도 하다. 박정근의 시선은 우리가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흔히 만나는 것들과는 다소 다른 어휘들와 문법을 가지고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박정근은 목수다. 전국을 떠돌며 집을 짓는 그는 일하는 틈틈이 주변의 일상을 그린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무작정” 그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과묵하기만한 동물들로부터 그림을 배웠다고도 말한다. 그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상들은 그가 늘 익숙하게 보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익숙한 것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대상을 혹은 잘 알 수 없는 대상을 혹은 불가해한 세계를 좀 더 잘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 그가 다가서는 곳은 세계를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지점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어떤 함의며 그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게끔 이끌어가는 실현의 방식이다. 이것은 ‘그림의 힘’이다. 동시에 그의 삶이 내포하는 역동적인 힘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들은 예술로서 난해한 의도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한 난해함은 그가 삶을 통해 구현하려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에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들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 묻고 그 질문에 의해 자신이 얻은 이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을 가치들로 구분한다. 그림이라는 표현은 그 가치들을 보존하려는 본능적인 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조야함은 자신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묻고 다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시적인 시선이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기를 실현하려는 솔직한 몸짓일 뿐이다. 때문에 삶을 표현하는 그의 그림들은 그 스스로가 이해하는 세계를 구성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세계와의 관계에서 박정근이 일상적인 삶을 통해 구현하는 경험적이고 미적인 구별이며 자연스러운 행복감이다. 그의 작업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스스로 마주 친 질문은 무엇이 예술적 행위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술을 특별한 어떤 것으로 범주화하고 난해함을 기대하면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한 것이다. 박정근의 삶과 그림들은 내 안에서 예술에 대한 모든 차가운 지식들을, 즉 예술에 대한 하릴없는 관념적 반영과 미망들을, 그렇기 때문에 삶의 모습들을 은폐하는 모든 난해한 언어들을 일순간에 침묵하게 만든다. 그 순간 내가 다시 보는 것은 일상 세계 안에서 불가사의하게 쓸모없어지는 모든 보편적 관념들이다. 마치 나 자신을 비추어 흠칫하게 만드는 거울처럼. 정현주, 독립큐레이터2015. 7. 24.